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미국에 끼친 영향 === [[파일:End_Vietnam_War.gif]] 일단 [[종전]] 소식을 들은 미군들은 당장은 기뻐했으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국으로 귀환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중들의 싸늘한 눈초리와 비난,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PTSD]]뿐이었다.[* 당시 미국 경제도 1960년대까지 이어지던 황금기가 끝나고 불황으로 접어든 상황이었다.] || [youtube(ezI1uya213I)] || ||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국가]].[* 다소 시끄럽고 전장의 소음을 묘사한 기타 소리가 공포스럽게 들릴 수 있다.] 초반에는 정상적인 연주로 들리나, 후반부는 폭탄이 투하되는 소리, 폭격 소리, 사이렌 소리, 사람의 울음소리, 그리고 미군에서 추모곡으로 사용되는 '탭스'의 멜로디를 섞어 베트남 전쟁과 미국 정부를 풍자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 >'''I had a brother at [[케산 전투|Khe Sahn]]''' >케산 전투에 전우가 있었지 >'''Fighting off the [[베트콩|Viet Cong]]''' >[[베트콩]]과 전투 중이었어 >'''They're still there; he's all gone'''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전사했어. >'''He had a woman he loved in [[사이공|Saigon]]''' >[[사이공]]에 걔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I got a picture of him in her arms, now''' >지금은 그녀의 품안에 안겨 찍힌 걔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 - 미국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in the U.S.A.]]' 가사 중에서 1964년 베트남 개입 이후 1975년 4월 30일 전쟁 종식까지 베트남 및 기타 인도차이나 일대의 전쟁에서 전사, 실종되거나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후 사망한 미군은 공식적으로 58,315명이다. 이외 당시에는 생존했으나 부상이 악화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사망하여[* 특히 고엽제 피해자가 많았다.] 집계가 안 됐거나 심한 부상을 입은 군인까지 합치면 참전병 300만여 명의 15분의 1인 2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자 및 유족처리, 미국 사회에 다수의 상이병사,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 등으로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난 시대가 1970년이고, 그 이전의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보면 미군이 입은 피해가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다. 미군이 베트남에 있던 9년 동안 미군 5만 8천 315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미국 입장에서 1년 동안 12만 6천 명이 전사한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4년 동안 40만 7천 300명이 전사한 [[제2차 세계 대전]][* 28만 7천 300명이 서부전선에서 12만 명이 태평양에서 사망.]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이다. 또한 3년간 3만 6천 574명이 전사한 [[6.25 전쟁]]과 비교해봐도 약 11년 동안 5만 8천 315명이 죽은 베트남 전쟁 때보다 미군 사망율이 더 높은 걸 알 수 있다.(다만 베트남 전쟁의 경우 6.25 전쟁과는 다르게 일정한 전선없이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20여년 동안 도합 8천에 가까운 미군과 기타 연합군이 전사했지만 투입한 병력 자체가 베트남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고 적인 탈레반과 이라크 반군은 개전 초기를 제외하면 북베트남군 정도의 공세도 하지 못했으므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1960년대까지의 황금기가 종료되고 불경기가 시작된 참이었는데[* 게다가 소련과의 핵전쟁이 불가능해진 뒤로 양측의 대결은 동시기의 남북한처럼 체제대결로 전환됐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돈이 깨졌다.] 이 때 베트남에서 전쟁까지 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데다[* 상기에 살짝 언급이 됐지만 베트남 전쟁 수행을 위한 달러화 추가 발행 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1971년 의회의 동의 없이 기존 [[브레튼 우즈 체제]]를 깬 [[스미소니언]] 체제를 출범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금융시장의 질서라 할 수 있는 브레튼 우즈 체제는 '금 1온스=35달러'의 고정환율로 미국은 이 금본위제를 25년 간 지켜왔는데 이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전까지만 해도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의 통화수지 적자를 견디면서 미 달러화의 가치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통화수지 적자가 가중되었고 동시에 미 달러화의 가치도 떨어지는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에 빠지게 되면서 '금 1온스=38.02달러'의 교환비율로 금본위제를 재조정하여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결국 누더기가 된 금본위제는 베트남 전쟁 종전 후인 1976년에 전격적으로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할 [[특별인출권]] 제도의 도입, 고정환율과 변동환율의 선택적 적용 등을 골자로 한 [[킹스턴(자메이카)|킹스턴]] 체제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자세한 설명은 [[국제통화기금]](IMF) 문서 참고.],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적인 경향이 뚜렷해졌으며 [[마약]]이 확산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소련 붕괴 전 까지 미국의 암흑기라 부르게 된 계기가 사실상 베트남 전쟁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여지껏 전쟁에서 져 본적 없었던 미국의 첫 패배, 그것도 소련 같은 강대국이 아닌 기껏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의 자그마한 약소국 하나를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 매우 굴욕적이었다. 결국 얻은 것은 없고 정치·경제의 위기 및 불안정한 사회 등 잃은 것만 있는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잡혀 고문 끝에 두 팔을 다쳐 후유증으로 두 팔을 높이 들지 못했던 미국의 상원의원 [[존 매케인]]은 [[2000년]]에 왜 미국이 졌는지 열불난다는 연설을 했다가 베트남 측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종전 소식을 듣고 환호하며 귀국했던 미군들은, 징병제로 인해 병력의 태반이 강제로 군인이 된 새파랗게 어린 청년들이었음에도 국민들에게 '''살인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 비참한 현실을 마주했고, [[PTSD]] 등에 의해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도 있게 되면서 미국 사회는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당시 베트남 전쟁 귀환자를 욕하는 단어로 '''Babykiller'''라는 신조어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때 참전했던 상당수의 장병들이 사회부적격자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범죄자로 타락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사회적 비난도 비난이지만 당시 미국 경제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판이 되기 시작했고 당연히 보훈예산에 대한 투자도 줄었는데 그 여파를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정면으로 얻어맞았다. 참전용사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도 심각했으나 그보다는 애초에 줄 일자리와 줄 복지예산이 없었다. 물론 대부분은 악착같이 재적응에 성공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정신질환을 겪고 사는 사람도 있는 등[* 물론 미군 출신 상당수가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전역후 빈곤층, 노숙자가 되는 사례는 베트남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때는 투입된 병력도 많고, 전역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도 부족하고, 경제가 막장 되면서 일자리도 없고 해서 노숙자 수도 유의미하게 급증한 것이다.] 참으로 여러모로 미국에게 있어서는 괴로웠던 전쟁이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lbj-vietnam-recording-xl-e1392919685884.jpg]] 위의 사진은 1968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 사위이자 [[미합중국 해병대|미국 해병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찰스 로브 대위의 전황 음성기록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이 사위는 전쟁에서 생환한 뒤 훗날 대통령을 역임했던 장인어른처럼 정계에 입문하여 [[버지니아 주]]에서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다. 존슨이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열어줄 정도로 사랑해 마지 않았던 사위라고 한다. 그러다가 장인이 숨진 뒤에도 계속해서 정치를 하다 2010년대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가 영화 [[람보(영화)|람보]]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귀국한 [[존 람보|람보]]가 겪는 PTSD와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람보의 동료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다. 게다가 람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들 때문에 지금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당연히 좌익계열 인사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으로 찍히고(사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도 그들에게 미국은 주적이긴 했으나 이를 대놓고 표출하기 시작한 분기점은 베트남 전쟁이 맞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를 넘어서야 그런 인식이 좀 잠잠해진다. 심지어 [[1980년대]] 당시 [[유시민]]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으로 표현하였고 [[리영희]]는 북베트남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문재인]]은 미국의 패배와 북베트남의 승리를 보며 희열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세계적 반미, 좌익 진영에서 한동안 북베트남은 이렇게 미국을 무찌른 [[아이돌]] 대접까지 받았다. [[68혁명]]이 끝나고 당시 부상한 신좌파 세력이 역풍을 맞으며 한동안 후에 학살을 비롯한 북베트남측의 전쟁 범죄를 조명하고 오히려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명분을 주려는 수정주의적 동향도 한동안 유행하긴 했으나 여전히 주류적 평가는 북베트남측의 명분을 어느 정도 보장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아예 북베트남 얘기는 안하고 전쟁을 마치 남베트남, 미국, 남베트남 내 베트콩만 치룬 양 묘사하는 동향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전쟁의 기원을 따지자면, 미국의 대규모 지상군 파병으로 인해 흔한 냉전기 탈식민지 국가 안의 정치적 소요사태가 대규모 전면전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이긴 베트남도 상당히 고무되어 자신들을 세계 공산주의 전선의 최전방으로 인식하고 소련과 중국도 유약하다고 질타하면서 [[무아마르 카다피]]나 [[김일성]]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각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에 나섰으나 베트남 전쟁으로 입은 심각한 피해, 그리고 공산주의 경제정책의 처참한 실패로 인해 내부적 불만이 너무 증가함에 따라 공격적 행보를 중단하고 도이모이 정책을 실시함으로 유연해지게 된다. 하지만 1991년 [[소련 해체|소련의 붕괴]]에 반발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소련을 지키자고 호소하는가 하면, [[덩샤오핑]]에 제2의 [[코민테른]] 창설을 제의하는 등 세계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상당히 나중에도 미련을 보였다. 물론 소련과 중국 모두 베트남의 제안은 씹어버렸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상당히 막장이었는데 [[미라이 학살|윌리엄 캘리]]급의 막장도 훈련병 시절의 성적만 괜찮으면 [[단기간부사관|GTG]]를 통해 장교로 임관시킨 탓에 [[위관급 장교]]들의 질적 수준이 완전히 개판이었고 이 때문에 [[프레깅]]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지만 부대원이 짜고 전사라고 주장해서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수사가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한 미국은 결국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이후 모병제로 병력 충원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 [[매브니]] 제도를 도입, 실시했다. [[탈레반]]과 전쟁할 때는 정규군이 아닌 공군과 특수부대 위주로 대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